천생 문과였던 내가 예상치 못한 컴공에 갔어도 기뻐했던 이유는 분명 오타쿠 특유의 천성 탓이다. 내가 드라마, 영화 몇 편만 안 봤어도 공대에 대한 헛된 환상은 없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 친한 언니와 함께 종종 영화를 같이 보러 갔다. 우리는 덕질을 하다가 우연히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된 케이스라서 남들에게 차마 보러 가자고 말은 못 하겠는, 어느 정도 마이너스러운 장르의 영화를 같이 보러 다녔다. 물론 인기 있는 상업 영화도 자주 보러 갔는데, 그것도 같이 보러 갈 사람을 구하기 힘든 시리즈물이 다수였다. 보통 시리즈의 속편을 처음 본다고 하면 이해를 못할 것이라고 대부분 피하지 않던가? 하지만 오타쿠적 호기심 정도야, 나중에 VOD를 구매해서 보면 해결될 일이기 때문에 내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 보러 간 영화는 스타 트렉 다크니스였다. J.J 에이브람스(이하 쌍제이)가 새롭게 리부트한 그 스타 트렉의 영화 시리즈 되시겠다. 2013년 당시, BBC 드라마 셜록으로 내 또래 청소년들을 죄다 울리던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출연한다는 말만 듣고 예매했었다. 그런데 무슨 독특한 손 모양으로 장수와 번영을 말하는 차가운 벌칸 남성 스팍한테 굴비 두릅 마냥 돌돌 말린 오타쿠가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집에 오자마자 집의 IPTV에서 스타 트렉을 미친 듯이 찾았고, 더 비기닝을 찾자마자 엄마에게 허락을 구해 결제했다. 영구 구매를 하고 싶었지만, IPTV 유료 구매의 권한은 당시 내게 없었기에 대여로 이용 가능한 이틀 동안 열심히 돌려봤다.
다크니스를 보고 입덕한 뒤. 시간이 흘러 성인, 대학생이 되었다. 이제 엄마 아빠 허락 없이 카드결제가 자유로워진 성인이 되었다. 넷플릭스의 맛을 알아버린 대학생은 스타 트렉 원작 드라마를 저스틴 린 감독이 제작한 비욘드가 개봉하기 전에는 절반 정도 보겠다는 목표를 갖게 되었다. 차라리 공대생이 되었으니, '내가 사랑한 스타 트렉을 선명하게 덕질해주겠다', 여기에 전공 지식을 곁들여서 '음~ 이건 이런 식으로 프로그램을 짰을 듯!' 하고 멋지게 대입도 해보는 '전공 오타쿠', 좀 굉장한 트레키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오리지널 원작 드라마가 정말 굉장했다. 이미 애정이 있던 작품이라 높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 드라마를 먼저 봤어도 당연히 박수를 쳤을 것이다. 물론 60년대에 만들어진 작품이니 현재에서는 약간 의아한 부분도 있었으나, 우선 작품 자체가 훌륭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오히려 쌍제이가 드라마와 다르게 각색한 부분을 보고 황당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입덕한 시리즈에 이렇게 화를 내도 괜찮나? 싶었지만 원작이 정말 취향이고 좋았다. 그 이후에 비욘드를 보니 훨씬 만족스러웠다. 특히 저스틴 린이 제작한 비욘드 버전은 원작의 내용을 더욱 따른 편이라 그런지, 확실히 쌍제이의 두 작품과는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스타 트렉에 입덕한 계기는 분명 다크니스였는데, 만족도(=오타쿠가 아무도 안 물어봤어도 혼자 벅차오르며 감탄하는 기준)는 오리지널 드라마와 리부트의 비욘드가 훨씬 높아졌다.
내게 스타 트렉은 클래식은 영원하다는 뜻밖의 교훈을 준 작품이 되었다. 여전히 광활한 우주를 보면 설레고, 아직 만나지 못한 너머의 세상에 벌칸을 비롯한 타 종족이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다.
단순히 오타쿠적 감상에 젖어 '정말... 굉장한 이야기였어...!'라고 감탄했던 어린 시절의 감상에서 벗어나, 콘텐츠 기획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다시 고찰해보니 더 대단한 작품이었다. 얼마나 원작을 완성도 있게 잘 만들었으면, 몇십 년이 지나서도 새롭게 각색하여 재창작할 수 있을까?
특히 SF 장르의 경우, 과학 기술 발전의 여부를 생각하면 '2021년인데 이건 역시 안 되네, 촌스럽다!' 같은 평이 생각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스타 트렉에서는 실제로 현실에서 발명된 장치, 장비들을 보면서 어떻게 60년대에 저런 생각을 했나 싶을 정도로 현대의 모습이 떠오르는 장면이 많았다. 작품에서 일찍 사망할 가능성이 높은 캐릭터 보고 레드 셔츠를 입었다고 하는 말이나, 현대 공돌이들의 바이블로 스타 트렉이 있었다는 농담은 이미 흔해졌다. 온갖 운영체제의 이모지🖖에서도 빠지지 않는 하나의 인사로 굳혀졌을 정도니까. 스타 트렉 뿐 아니라, 이런 식으로 리부트된 작품들은 결론적으로 원작 콘텐츠 자체의 질이 고급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연재 중이거나 제작된 작품도 멀지 않은 미래에 재창작될 가능성이 큰데, 과연 어떤 내용으로 만들어질지 궁금하다.
어째 잘 만든 클래식이 재창작 등으로도 100년을 갈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작품을 향한 매니악한 찬양이 된 것 같다. 내 블로그... 과연 괜찮을까... 아무튼 장수와 번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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